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안중근 의사 하얼빈 의거 (문단 편집) == 과정 == [include(틀:경술국치)] [include(틀:영상 정렬, url=5lIAxr-UDAs)] 1905년 초대 [[한국통감부|한국통감]]을 지냈다가 막후로 물러나 [[일본 제국]]에서 [[추밀원(일본)|추밀원]] 의장을 지내고 있었던 이토 히로부미는 [[러시아 제국]]과의 철도 문제, 경제 현안, [[러일전쟁]] 뒷처리 등을 논의하기 위해 러시아 제국 [[재상]]인 [[코코흐체프]]와 회담을 갖기로 했고 러시아가 [[청나라|청 제국]]에게 조차한 [[하얼빈]]에서 만나기로 했다. 그리고 이토는 회담을 위해 러시아 측에서 제공한 특별 열차를 타고 [[하얼빈역]]에 도착했다. 1909년 2월 7일 안중근을 포함한 12명의 동지들은 [[연해주]]에서 [[동의단지회]]를 결성해 각자 목표를 정하면서 왼손 약지를 잘라 그 피로 [[태극기]] 앞면에 대한독립을 써넣어 각자 암살에 대한 결의를 다졌으며 이후 10월 21일 [[안중근]]은 신문기사에 이토 히로부미가 10월 26일 [[중국]] [[하얼빈]]을 방문하여 [[러시아]] 재무상과 러일 간 경제 회담을 갖는 목적으로 방문한다는 정보를 알아내 [[우덕순]], [[조도선]], [[유동하]] 등과 함께 이토 히로부미 저격을 계획했다. 25일 안중근은 거사 동지인 우덕순과 함께 기차를 타고 하얼빈으로 출발하였다. 1박을 머문 끝에 다음날 하얼빈에 도착한 안중근과 우덕순은 러시아에서 [[세탁소]]를 운영한다는 재러시아 [[한국인]] 조도선을 만났다. 그는 거사에 동의하였다. 그 중 기차들이 중간에 정차하게 되어서 쉬어간다는 '차이자거우(蔡家具/채가구)역'에서 우덕순, 조도선이 거사를 분담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신문 기사에 이토의 특별 열차도 차이자거우 역에 정차한다는 예상이 나오자 세 사람은 차이자거우로 향하여 기차역 객사(客舍)에 머물며 거사를 준비했다. 그러나 철도들의 분기점[* 지방에 위치한 시골 역이었기 때문에 규모가 작아 경비 인력이 역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인 차이자거우역은 경비가 삼엄해 객사에서 나가 의거를 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던 데다 러시아 육군 병력이 보안을 이유로 열차가 지나갈 때까지 숙소 문을 잠가 버려 탈출도 불가능했다. 다행히 당초에 차이자거우에 왔던 안중근은 하얼빈 거사를 위해 우덕순, 조도선에게 차이자거우 거사를 분담하면서 자신은 이미 하얼빈으로 이동하였던 상태였다. 만약 이때 안중근마저 객사에 갇혔다면 하얼빈 거사도 실패하였고 이토도 무사히 경제 회담을 마치고 [[일본]]으로 살아서 귀국했을 것으로 예상된다. 어떻게 보면 이들이 객사에 갇힌 게 다행인 게 이들이 기차에 억지로 난입해 의거를 시도했다가 실패했다면 이토는 회담 장소를 옮기거나 연기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차이자거우에서 거사에 실패한 우덕순, 조도선은 안중근의 하얼빈 거사 성공 이후 차이자거우역 객사에서 러시아 육군 [[헌병]]에 체포되어 압송되었다. 차이자거우 거사가 실패함에 따라 안중근은 하얼빈으로 건너가 드디어 이토와의 운명을 결정할 거사 준비에 돌입했다. 단신으로 하얼빈에 도착하여 [[일본인]]으로 위장하고 기차역에 입장했다. [[서양인]]들은 물론, [[한국인]]과 일본인도 서로를 외모로 구별하는 게 힘들다. 인종적 특징이 거의 같기 때문이다. 기차역에는 양국 수뇌를 환영하기 위해 [[일본인]]과 [[러시아인]], [[중국인]]들[* 사실 중국인이 제일 많았다. 비록 러시아의 [[조계지]]이긴 했어도 엄연히 [[청나라]]의 영토였기 때문이다. [[영국령 홍콩]]이 영국 조차지였지만 [[한족]] [[홍콩인]]이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한 것과 마찬가지다.]이 나오게 되었고 신변 경호를 위해 러시아 육군 헌병 및 청 육군들이 호위 삼아 경계를 서고 있었다. 드디어 이토 히로부미 일행을 태운 특별 열차가 하얼빈역에 도착하고 기차 안에서 이토 일행이 모습을 드러내자 환영하러 나온 군중들이 [[러시아/국기|러시아 제국 국기]]와 [[일장기]]를 흔들면서 양국 수뇌를 환영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안중근은 이토 히로부미와 면식이 없었던 탓에 수많은 군중과 섞여 있는 이토를 알아보지 못했고 일을 그르치는가 했다가 일부 군중이 이토의 이름을 부르자 백발에 길고 흰 수염을 가진 남자가 뒤를 돌아보며 손을 흔들어 주는 모습을 보고 그가 바로 이토임을 인식했다. 이에 품 속에 있는 권총[* [[FN M1900]] [[자동권총]]을 사용했으며 [[S&W M2]] [[리볼버]](육혈포)는 소지했으나 사용하지 않았다.]을 준비하여 이토를 향해 조준하고 이토가 러시아 육군 병력 사이에 지나가고 있는 순간 그를 향해 첫 발을 쏘았다. 첫 발은 바로 이토의 몸을 관통하였고 안중근은 [[확인사살|계속해서 2~3발을 추가로 발포]]했다.[* 이는 이토 히로부미의 얼굴을 모르기 때문이었는데 이미 이토는 이전에 [[원태우]] 의사에게 죽을 뻔했기 때문에 신변의 위협을 느껴 자신의 사진이 나도는 걸 막았다.] 이토는 결국 땅바닥에 쓰러졌고 안중근은 혹시 다른 사람이 이토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일행들 중 하얼빈 총영사 가와카미 도시히코, [[궁내성]] [[대신]] 비서관 모리 타이지로, [[만주]] 철도 이사 다나카 세이타로에게도 총탄을 발포하여 중상을 입히고 총알 한 발을 남겼다.[* 이걸 '''자결용이라고 추측하는 경우가 많은데 아니다.''' 안 의사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로, 가톨릭에서 [[자살]]은 과거에는 장례 미사도 치러 주지 않았을 정도로 큰 죄악이다. 당시 자결할 생각이 추호도 없었고 이토 처단 후 재판에서 이토의 죄를 낱낱이 밝힐 생각이었다고 여러 번 진술했다. 총알 한 발을 남긴건 이미 이토가 쓰러져서 더 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 총알 한 발을 하나의 메시지로 해석하는 이야기도 있다. 당시 안중근은 이토를 저격하고도 혹여 변장했을까 싶어 이토 히로부미 주변의 일본인들도 저격했는데 이토가 쓰러졌으니 쏘지 않았다는 건 모순이라는 것. 이 관점에서의 해석은 자신이 무차별적으로 사람을 죽인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한 발을 일부러 남겼다는 것이다.] [[http://m.yna.co.kr/kr/contents/?cid=AKR20160323193400004&mobile|#]] 안중근은 즉시 청과 러시아의 호위병들에게 체포되었고 '''"코레아 우라!(Корея Ура!, 대한국 만세!)"'''라고 외쳤다.[* 당시 안중근이 과연 어느 언어로 이 말을 외쳤는지는 불분명하다. 통상적으로는 [[러시아어]]라고 받아들여지나 서로 충돌하는 1차 사료가 많아 해석이 난해한 편. [[에스페란토]]라는 설도 있으나 널리 받아들여지지는 않는다. 이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https://www.esperanto.or.kr/?module=file&act=procFileDownload&file_srl=7242&sid=9a56b5ea54db7ccedcbb8d348469abae&module_srl=150|신현규 교수가 낸 관련 논문(PDF 자동 다운로드 링크)]], [[https://www.kci.go.kr/kciportal/ci/sereArticleSearch/ciSereArtiView.kci?sereArticleSearchBean.artiId=ART002688749|(KCI 등재)]]을 참고해 보면 좋다.][* 흔히 대한민국 만세라 외쳤다고 생각하지만 암살 시점은 아직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생기기 10년 전이었으므로 대한국 만세 혹은 대한제국 만세라고 외쳤다고 보는 게 옳다. 사실 임시정부 수립 시도 중 대한민국이란 이름을 지을 때조차도 논쟁이 있었기에 안중근이 대한민국이란 어휘를 미리 알았을 리가 없다. 임시정부 수립 논의 당시 20여년 잠깐 썼던 대한제국을 따서 만든 대한민국이란 말 대신 500년짜리 전통이 살아 있고 해외에도 기록이 많이 남은 국호인 조선임시정부로 하자는 의견이 꽤 있었다.] 한편 이토는 총탄을 맞은 직후 기차 안으로 옮겨져 자신을 수행하던 의사 고야마 젠의 응급 처치를 받았지만 20여 분 만에 숨이 끊어졌고 동행했던 그의 [[손자]]가 유언은 없다고 공식적으로 확인했다. [[하얼빈]]은 청나라 땅에 러시아 조계지이므로 러시아 내지는 청나라에서 조사 후 재판받는 게 맞았다. 실제로 [[한국인]] [[변호사]]들은 러시아 헌병이나 청나라 [[경찰]]이 이를 조사하고 청나라에서 재판하기를 원했지만 청나라에 있었던 [[일본 제국 경찰]] 영사는 상황의 심각성에 따라 안중근의 신병을 [[일본 제국|일본]]으로 넘겨 버렸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